"주님, 저만 아픈 게 아니었습니다"
한 손은 엄마 손을, 한 발은 땅에, 다른 한 발은 허공을 향해 들어올리며 뛰어가는 아이들을 봅니다. 왜 아이들은 엄마 아빠 손만 잡으면 저렇게 폴짝 폴짝, 리듬에 맞춰 종종거리며 뛰는 듯 걸을까요? 홀린 듯 그 모습을 쳐다보다, 언젠가 제 손에도 들어왔던 조막만한 손, 까치같이 뛰어다니던 발, 내 품 안에 쏙 들어왔던 병아리털 같던 내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떠올립니다. 어느 여름, 공항 게이트로 들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볼 때만 해도 그 긴 시간 연락도 하지 못한 채 떨어져 살 줄을 몰랐었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제 키만큼 쑥 자란 모습으로 저에게 나타났습니다.
“어리석은 일을 하는 미련한 사람을 만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나라.” (전도서 17:12)라는 성경구절을 읽을 때 마다 ‘차라리 미련하거나 어리석은 게 낫지, 새끼 뺏긴 암콤이 얼마나 아픈지 아시긴 아시는 겁니까’ 하면서 하늘에 종주먹을 들이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내 아픔에, 내 자아에 매몰되어 긴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만 아픈 게 아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missing”과 “parting”의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해마다 한국에 가서 시험관 아기 시술을 하고 돌아오는 친구도 있었고, 원치 않은 유산과 낙태를 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고아원에 맡겨져 엄마아빠와 헤어져 살았다는 후배의 희미한 기억도 듣게 되었습니다. 도롱뇽 알을 찾아 산에 올랐다 실종된 “개구리 소년”들을 찾아 생업을 포기하고 십 년 넘게 전국을 헤매었다는 부모님들, 이복 동생들을 찾아 헤매던 권정생 선생의 동화 『몽실언니』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분단으로 헤어져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남북한의 이산가족들,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양육권을 박탈당한 한국의 이혼 여성들, 자녀를 떼어 놓고 한국에 와서 돈을 버는 이주여성들과 미국의 네일 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히스패닉 이주 여성들. 주님 저만 아픈 게 아니었습니다.
주님, 이 사순절, 그렇게 아픈 엄마들이, 아버지들이, 언니 오빠 누나 형들이, 전통적 가족관계 너머의 사람들이, 무연고자들이 위로 받길 원합니다. 주님 위로하여 주십시오.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그들이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그들이 낳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복 받은 자손이며, 그들의 자손도 그들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다. (사 65:17-23)
찢어지는 가슴과 눈물은 한 켠에 간직한 채, 아픈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설하고, 나누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픈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세상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픈 이들이 아픈 이들을 위로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기댈 품을 찾기 보다는 하늘만 쳐다봐도 주르르 떨어지는 그리움의 눈물이, 수치스러운 기억들이, 미약함이야 말로 다른 아픈 이들이 기댈 넉넉한 품임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주님의 편지가 되어 “너희는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희는 미약합니다. 도와 주십시오. 내 백성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anonymous mother (GTU)